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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아이돌> 저자 윤혜은의
아프레스키 공연 실황 속으로
안녕하세요, 저는 에세이를 쓰는 프리랜서 작가이자 망원동에서 동료 작가와 함께 ‘작업책방 씀’을 운영하는 윤혜은입니다. 변방의 케이팝&아이돌 덕후이기도 해서 매일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콘텐트를 즐길 시간을 꼭 마련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한편, 저는 일상을 벗어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요. 그런 제가 몇 안 되게 간직하고 있는, 낯선 곳에서의 추억은 전부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들 덕분이더라고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이고요. 저 혼자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고, 시도조차 않을 여행을 한 해 동안 함께 수고한 이와 맞이해 더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아요. 연말연시 여유는커녕, 몰아치는 일들에 마음이 복잡한 심정으로 꽉 차 있었는데, 그 일상을 기꺼이 잊게 만들어준 여행이 바로 이번 휘닉스 평창에서 보낸 1박 2일이었습니다.
여행은 바쁘고 지치는 일상을 잠시 잊게 한다거나, 또 그 시간들이 일상 속에서 나를 더 잘 돌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도 하잖아요. 저에게는 ‘덕질’이 여행의 역할을 해주곤 했었어요. 최근 <아무튼 아이돌> 이라는 책을 출간할 정도로 케이팝과 아이돌을 향한 무한한 덕심을 가지고 있는데요.
누군가를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고 사랑해 본 경험은 결국 자기 자신도 그렇게 돌볼 수 있는 너그러운 에너지로 돌아오는 같아요. 덕질은 얼핏 제 안에 있는 사랑과 열정을 소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오히려 팍팍한 현생을 지탱하는 큰 원동력에 가깝거든요. 이 삶을 포기 않고 살아낼 힘과 저를 더 나은 사람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일은 이렇게나 이로운 경험을 돌려준답니다.
휘닉스 평창에서 보낸 이번 여행이 특히나 저를 스스로 돌보는 시간처럼 느껴진 건 온도 레스토랑에서의 디너 뷔페 덕분이었어요. 단지 식당의 분위기가 근사하고 음식이 맛있었던 이유에서가 아니라 ‘내가 나한테 정말 좋은 시간을 선물해주고 있구나’ 하고 차분히 음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한낮에 신나게 액티비티를 즐긴 다음, 노곤노곤해진 몸과 마음으로 하루 끝에서 동료와 잔을 부딪칠 때. 미처 풀어내지 못했던 이야기가 자연히 흘러나올 타이밍이잖아요. 멋진 식사를 느긋하게 즐기면서 한 해를 열심히 버틴 서로를 향해 은은한 응원을 건네고 받았던 저녁 식사가 참 좋았어요.
또 케이팝 덕후로서 무제한 맥주, 와인, 그리고 다양한 뷔페 메뉴와 함께 DJ & 8586의 라이브공연을 즐길 수 있었던 아프레스키도 인상적이었는데요. 아프레스키는 ‘Apres + Ski’의 합성어로 ‘스키를 탄 후에’ 라는 뜻이라죠? 저는 스노우 빌리지에서 누구보다 열렬히, 제 안에 잊고 있던 무구하고 천진한 기분을 맘껏 누린 뒤, 스키하우스 라운지로 향했답니다. 요즘은 ‘온택트’라고 해서 무엇이든 비대면을 기반으로 온라인 상으로만 즐기는 콘텐트가 많잖아요. 저도 근 2년 간 각종 공연과 무대를 노트북 옆에서 맥주를 세워 놓고 관람하는 시간에 익숙해져 있었는데요.
아프레스키에서 즐긴 저녁은 모처럼만의 오프라인 공연이라 인상 깊었어요. 눈 앞에서 즐기고 피부로 느끼고 마음에 새기는 경험이 왜 중요한지, 간절해지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요. ‘화면 너머의 음악과 캔맥주’의 시간 속에만 머물던 저를 ‘스테이지 위 라이브와 생맥주’의 현장으로 데려다 준 아프레스키! 고마웠어요. (참, 직화불에 스스로 구워 먹는 마시멜로와 생맥주 콤보는 여행 후 돌아와서도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역시 오프라인 공연은 이렇게 몸에 새겨지는 증거가 남기 때문에 더 오래, 구체적으로 추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사계절 중에서 겨울을 유독 좋아하거든요. 탁 트인 풍경 속 아름답게 펼쳐진 설경을 볼 수 있어서 도착하자마자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어요. 저는 스키를 잘 즐기지는 못하지만 산 꼭대기에서부터 스키나 보드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레고처럼 자그마하게 보이는데 그 모습이 왠지 귀엽기도 했고요. 여러모로 마음이 어두워지기 쉬운 시국인데, 이 시기만을 기다려온 이들의 설렘 같은 게 입김처럼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걸 느낄 수 있어서 뭉클했어요.
저는 인스타그램에 #일기가요 라는 해시태그로 한줄의 가사로부터 시작되는 일기를 남기고 있는데요. 휘닉스 평창에서의 여행은 NCT-U의 <I.O.U>를 테마곡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첫째 날 밤에 야경을 보기 위해 곤돌라를 타고 몽블랑으로 향하며 들었던 노래이기도 한데요. 깊어가는 겨울날 들으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질 거예요.
따뜻하게 감싸주는 듯한 멜로디와 다정하고도 산뜻한 노랫말이, 겪어보지 못한 겨울의 기억을 만들어준달까요. 개인적으로는 케이팝이 청춘의 한 페이지를 조작하는 데 앞장서는(!)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이 노래는 누구나 한번쯤 갖고 싶은 겨울의 정수를 잘 담아낸 노래라고 생각하여 추천합니다! 이 곡으로 일기가요를 쓴다면, ‘머뭇거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 온몸이 얼어버린 대도’라는 가사를 붙잡고 휘닉스 평창에서의 짧고 굵게 반짝였던 하루에 대해 쓸 것 같아요.